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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충동이 아니다.

뇌과학자 정재승의 "우울증에 빠진 쥐를 물에 빠뜨리면 어떻게 될까?"를 보고 캡처본 정리-로 시작한 나의 생각들.

우연히도 알고리즘에  떨어지는 쥐 사진이 같이 나왔다.  귀찮음을 감수하고 영상을 눌렀다.

인간이라면 생명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존본능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쓸 텐데. 아니 애초에 쥐가 그 짧은 팔다리로 헤엄을 칠 수가 있던가?

코로나 시대에 20~30대와 7~80대의 불안이 제일 높다고 한다. 2030대, 특히 여성에서 자살율이 크게 올라갔다고.

자살은 이제 술먹고 감정적으로 저지르는 충동이 아니다. 이성적인 판단이다.

현재의 자살 멸시 풍조도 10년만 지나면 달라질 것이다. 학교에서 세뇌하다싶이 주입한 "통일" 처럼.

2000년대 후반, 201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한다. 그땐 다들 앵무새처럼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입을 모았다.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감히 통일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일원화된 사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무새'는 커녕, 손해에 초점을 맞추는 비관적인 시선이 강해졌으며, 각종 차별 및 고정관념을 인식하고 바꿔나가는 시대다.
아직도 전통적 가치를 주창한다면, 우리는 그를 꼰대라고 부른다.  시대의 변화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신 꼰대야"라고 부르는 순간, 그 단어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토록 유용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자살이 나약해서 하는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고?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다. 생존을 위해 유전자에 새겨진 원칙이다.  내가 그 소중한 인생을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 낭비하는 동안, 그 주변인들은 무슨 도움이나 주었다고?

현실을 피할 수 없으니까, 멈추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내가 하는 행동도 노력도 의미없다고 느껴질 때, 그 힘든 저울질을 하며 계산하는 이들을 마치 죄인 취급하며, 죄책감마저 심으려고 하는 사회는 잔인하고 역겹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 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지 혼자 가버리면 주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어.."란 말엔 원망과 질책이 섞여 있다. 이것이 개인이 아닌 무리에 초점을 맞추는 동양의 특성이든, 한국의 특성이든 앞으로는 바뀌어야 하며, 바뀔 것이 분명하다.

자살도 개인의 선택으로써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말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지껄일 시간에 돈을 보내주든지,  진짜로 진심으로 평생 친구가 되어주든지.  실질적인 도움 하나 없이 자살을 말린다? 오랫동안 자살을 고민한 사람에게 있어 당신은 짜증나고 피곤한 위선자일 뿐이다.